소통공간
[예술과 오늘]전통의 사물화 혹은 키치화
- 이길중
- 25-08-16
- 1 회
그러나 전통사회가 붕괴하고 일제강점기를 통해 서구 문물이 유입되면서 이전의 서사와 도상들은 소멸해갔다. 근대 이후 미술은 미술 내적인 담론을 거론하거나 지극히 개인적인 텍스트에 기반하면서 공통된 서사로부터 이탈했다. 근대에 들어와 특정 텍스트에서 해방된 이미지는 이제 순수한 감상을 위한 시각적 이미지가 됐다. 순수미술, 현대미술은 공동체가 아니라 철저한 개인의 문제로 환원된다. 이로 인해 실용적 도구이자 수공예로부터 예술의 구분이 이루어졌고, 이전 시대에 만들어진 것들이 새삼 ‘예술 작품’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지금 박물관에 소장된 모든 유물은 본래의 맥락에서 벗어나 순수 전시 가치로 변질된 것들이다. 특정 장소에서 모종의 이야기를 구현하던 이미지들이 탈장소화, 탈맥락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전시장으로 이동하고 해당 텍스트는 망실됐다. 그러니 그 문맥을 모르면 온전한 작품의 이해는 요원하다.
최근 우리 민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높아졌고 이를 모방하는 미술인의 숫자가 팽창하고 있다. 더구나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인기에 힘입어 까치와 호랑이 배지와 같은 굿즈를 수집하기 위한 관람객이 국립중앙박물관 앞에 장사진을 치고 있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이례적이다.
그런데 그 작호도(鵲虎圖·까치와 호랑이를 그린 민화)란 과연 무엇인지 아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문맥에 대한 이해 없이 이미지만 소비되는 현상은 아닐까? 전통이 박제화, 사물화, 키치화의 과정을 겪는 것은 아닐까? 민화에 대한 관심은 소중하지만 그것은 우리 민족의 원형을 이루는 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동반하면서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우리 조상들, 즉 동이족에게 새는 조상신·수호신이자 지상계와 천상계를 연결하는 영매였다. 새를 토템으로 한 동이족은 삶의 곳곳에 새 이미지를 안겼다. 새는 하늘의 소식도 안긴다. 까치는 하늘의 기쁜 소식을 알리고 호랑이는 삿된 기운을 몰아내주기에 한 쌍으로 작호도가 그려진다. 까치는 민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서낭신의 심부름꾼으로도 알려져 있다. 호랑이는 예로부터 나쁜 귀신을 씹어 먹는다고 전해온다. 귀신을 막아주고 착한 사람을 도와주는 영물로 인식됐다. 양(陽)의 동물인 호랑이는 음(陰)의 존재인 귀신과 도깨비를 능히 잡아 후려치고 부러뜨리며 깨물어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이 그림을 앞에 두고 소원성취를 간절히 희구하면서 사악하고 못된 귀신들과 싸우며 착하게 살아온 것이 우리 조상들이란 얘기다.
한국 문화의 원형이 민화 안에 고스란히 잠복해 있으니 조선의 민화란 결국 한국인의 심성, 신화와 종교, 가장 인간적인 소망과 기복 신앙적인 성격이 오롯이 담긴 소중한 텍스트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그러한 문맥의 이해가 동반되는 동시에 민화의 뛰어난 회화적 특성에 대한 인식이 함께 이루어졌으면 하는 것이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14일 북·미 대화가 재개되려면 양국 간 ‘밀고 당기기’가 필요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은 핵보유국 지위 인정을 요구하지만 미국은 그럴 수 없다는 입장인 상황에서 접점을 찾아야 한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조 장관은 이날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개최한 브리핑에서 북·미 대화를 두고 “북한은 미국과 대화를 한다면 핵보유국 자격을 받아들이라는 식으로 나올 것”이라며 “그러나 현재까지 미국은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조 장관은 “그래서 (북·미 간) 여러 가지 밀고 당기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조 장관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리더십으로 뭔가 될 것을 기대한다”고도 했다.
북한은 최근에도 비핵화가 아닌 핵군축 등을 주제로 한 미국과의 대화 가능성을 시사하는 입장을 내고 있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이날 “완벽하게 비핵화를 전제로 해서만 협상할 수 없고, 핵군축 협상도 할 수 없을 것”이라며 “(북·미가) 어디선가 접점을 찾아서 협상을 시작할 것으로 본다”고 했다.
조 장관은 오는 10월 말쯤 열리는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만날 가능성을 두고는 “가정적인 상황이라 답변할 수 없다”라고 밝혔다. 조 장관은 다만 “외교는 희망을 근거로 정책을 만들면 안 되지만, 희망을 잊어서도 안 된다”라며 가능성을 열어뒀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김 위원장을 APEC에 초청하는 문제를 두고 “그런 것을 꿈꾸고 해보려는 건 훌륭한 생각”이라며 “그러나 외교는 현실에 기반해서 해야 하니까 조심스럽게 관계 부처와 협의해 나가고 있다”고 했다.
조 장관은 미국과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등 동맹 현대화 문제를 실무에서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다만 “협상이 진행 중이라 상세한 내용을 말하기는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조 장관은 한·미 정상회담의 결과물에 이런 내용이 담길지를 묻는 말에 “포함할지 여부도 하나의 협상”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정상회담의 결과를 공동성명 등 어떤 형식으로 발표할지도 미국과 협의 중이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정상회담 의제를 두고 “관세 협상의 결과와 관련한 중요한 내용을 (결과물에) 담을지, 방위비(국방비) 및 주한미군 문제 등 안보 이슈를 일관성 있는 문서로 만들어 내느냐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당국자는 “이게 미국에 내주는 것처럼 비칠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라며 “미국과 협력해서 우리 국방력을 발전시키는 좋은 기회”라고 했다.
조 장관은 일본과의 협력도 중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관계 발전과 과거사 문제를 분리하는 ‘투 트랙’ 대응이 쉽지는 않다면서도 “한·일관계는 변모하는 국제질서와 경제안보 상황과 관련해 소통하고 필요한 협력을 해나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조 장관은 “과거사 문제는 잊지 않고 꾸준히 인내심을 갖고 협의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조 장관이 지난달 말 미국보다 일본을 먼저 찾은 건 이 대통령의 지침에 따른 것이라고 전했다. 이 당국자는 이 대통령이 이달 말에 일본에 이어 미국을 연쇄적으로 방문하는 것을 두고 “미국 내에서 가지고 있던, 또는 잘못 입력된 우리 정부에 대한 편견이 일거에 깨끗하게 사라지리라 생각한다”라며 “이게 실용외교”라고 했다. 한·미·일 협력을 중시한다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정부가 중국에 기울어진 대외정책을 펼칠 것이란 우려를 씻을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조 장관은 중국과의 관계를 두고 “근본적인 차이가 있으나 이를 극복하고 일정 부분 협력할 필요가 있다”라며 “중국 측과 수시로 협의하고 필요하면 상호 방문하는 방향으로 실용적으로 접근해 잘 관리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조 장관이 앞서 일본과 미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의 문제점을 두고 의견을 교환했지만 한·중·일 협력을 통해 동북아시아에서 긴장을 완화해야 할 필요성도 언급했다고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말했다.
정부가 1945년 강제노역 피해 노동자 등을 태운 채 일본에서 침몰한 우키시마마루(우키시마)호의 피해자 명부와 규모 등에 대한 분석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일본 정부에게서 전달받은 승선자 명부 자료에 담긴 1만8000여명에 대한 심층분석을 연내 마무리할 계획이다.
행정안전부는 13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우키시마호 관련 단체와 유족들을 대상으로 ‘우키시마호 승선자 명부분석 경과보고회’를 열었다. 그간 진행된 우키시마호 승선자 명부 분석 현황과 향후계획을 설명하고 의견을 듣기 위해서 마련된 자리다.
우키시마호는 광복 직후 귀국하려는 재일 한국인들을 태우고 부산으로 향한 일본 해군 수송선이다. 1945년 8월22일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을 출발해 24일 교토 마이즈루항에 기항하려다 선체 밑부분 폭발로 침몰했다. 일본 정부는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당시 배에는 강제노역 피해 노동자 등 수천명이 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9월 19건, 같은 해 10월 34건, 올해 3월 22건 등 세 차례에 걸쳐 총 75건의 우키시마호 승선자 명부 관련 자료 등을 한국 정부에 전달한 바 있다.
한국 정부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을 통한 전문가 용역을 통해 우키시마호 명부 분석을 진행했으며, 지난 5월에 기초분석과 전체 자료에 대한 목록화 작업을 완료했다.
그 결과 1차 자료(19건)는 전체 명부의 기본 자료이고, 2차 자료(34건)는 1차 명부를 여러 기관이 수 차례 복제하거나 정리해서 작성한 명부이며, 3차 자료(22건)는 공문 표지 등으로 명부 형태는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명부에 기재된 총 1만8300명(단순 합산) 중에는 동일인으로 추정되는 중복자가 포함돼 있어, 행안부는 이를 제거하고 오번역을 수정하는 심층분석 작업을 6월부터 진행하고 있다.
심층분석 작업은 올해 12월까지 완료될 예정이며, 이를 통해 그간 대상이 불분명했던 우키시마호 승선자 규모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행안부는 기대했다.
아울러 공부(옛 제적부) 등을 활용한 명부 수록자의 귀환·사망 여부 조사와 과거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자료와의 교차분석도 내년 상반기까지 수행해 명부의 신뢰성을 높일 계획이다.
행안부는 분석결과 확인된 강제동원피해자에 대한 위로금 등 지원 방안을 검토하고, 승선 여부 확인을 요청하는 유가족에게 정보를 제공할 계획이다.
한편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의 진상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일본은 우키시마호가 해저 기뢰를 건드려 폭침했고 승선자 3700여명 중 524명이 숨졌다고 발표한 반면 유족들은 일본이 고의로 배를 폭파했고 승선자 7500∼8000명 중 3000명 이상이 숨졌다고 주장했다.
2005년에 한국 정부가 진상조사를 벌였지만, 일본 정부의 발표가 부정확하다는 사실 외에는 폭발 원인이나 사망자 수와 관련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당시 진상 조사에 참여한 한 관계자는 “2005년부터 5년간 사건의 진상 조사를 벌였지만 일본 정부의 비협조로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건희 구속은 시작일 뿐…끝 모를 의혹 계속 늘어나는 중
김건희 여사(사진)가 지난 12일 구속됐다. 각종 의혹에도 윤석열 전 대통령의 권력을 방패 삼아 수사망을 피해온 김 여사는 남편이 파면되자 특검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최초로 ‘구속된 전직 대통령 부인’이라는 오명이 남았다.
김 여사는 지난 6일 민중기 특별검사 사무실에 출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같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이렇게 심려를 끼쳐서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자신을 한껏 낮추며 사과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자신에게 ‘국정농단’을 저지를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며 책임을 피하려는 말이란 해석이 나왔다.
김 여사는 4년 전에도 자신을 낮추는 듯한 말을 한 적이 있다. 김 여사는 20대 대선을 석 달 앞둔 2021년 12월 자신에 대한 허위 경력 의혹 논란이 커지자 “남편이 대통령이 되는 경우라도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며 사과했다. 윤 전 대통령이 취임한 뒤 김 여사의 행보를 보면, 애초 이런 약속을 실천할 의지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김 여사가 남편의 대통령 당선 및 취임 이후에도 수천만원에 이르는 명품 선물들을 스스럼없이 받았다는 사실이 특검 수사로 하나둘 드러나고 있다. 김 여사는 여당 공천에 개입하고 대통령 직무와 연관된 청탁에 관여하는 등 자신에게 부여되지 않은 ‘공적 권한’을 마음껏 휘두르려 했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던 윤 전 대통령은 아내 문제에는 한없이 관대했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를 비롯한 최측근 인사들이 윤 전 대통령에게 김 여사 문제 해결을 조언했다가 줄줄이 절연당했다. 윤 전 대통령은 김 여사가 최재영 목사로부터 명품 가방을 받은 사실이 공개된 뒤인 지난해 2월 KBS 대담에서 “매정하게 끊지 못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라며 아내를 옹호했다. 배우자를 관리하는 제2부속실 폐지로 위임받지 않은 ‘권력자’는 더욱 통제받지 않게 됐다.
2012년 3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중수1과장이던 윤 전 대통령과 결혼한 김 여사는 2019년 7월 남편이 검찰총장에 임명되면서 공식 석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총장 취임을 앞두고 김 여사의 코바나컨텐츠 뇌물성 협찬 의혹과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이 불거졌다.
윤 전 대통령이 검찰총장으로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 일가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를 이끌자 더불어민주당 등 당시 여권은 김 여사 관련 의혹 제기 수위를 높였다. 서울중앙지검장, 검찰총장, 대통령을 지낸 윤 전 대통령은 김 여사의 든든한 ‘뒷배’가 됐다. 검찰은 김 여사 앞에만 서면 날이 무뎌졌다. 김 여사는 강제수사나 소환조사를 한 차례도 받지 않았다.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도 검찰의 한 차례 출장조사 끝에 고발 4년6개월 만에 김 여사를 불기소하는 것으로 종결됐다. 반면 주가조작 공범들은 대법원에서 줄줄이 유죄가 확정됐다.
국회는 민주당 주도로 김 여사 특검법안을 통과시켰으나, 윤 전 대통령은 세 차례나 거부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국민의힘 내 이탈표가 표결을 거듭할수록 늘어났다. 윤 전 대통령이 더 이상 특검법안을 막아내기 어려워지자 계엄을 선포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권력은 영원할 것 같았지만 ‘화무십일홍’이었다. 지난 4월 남편이 파면되면서 김 여사의 방패막이는 사라졌고, 이재명 대통령 취임 직후 여당이 특검법을 통과시키면서 김 여사는 검찰보다 더 강력한 칼을 가진 특검 수사를 받는 처지가 됐다. 사건 관련자들도 하나둘 입을 열면서 김 여사 관련 의혹은 수사를 거듭할수록 늘고 있다. 김 여사 구속은 시작일 뿐이다.
매일 세 끼를 짓는다. 초보 농사꾼이 마당에서 수확한 못생긴 가지, 호박, 토마토와 지역에서 생산한 쌀, 달걀이 주재료다. 끓이고, 굽고, 찌고. 마음도 손도 바쁘지만, 결과물은 언제나 소박하다. 두 식구 먹을 밥을 짓는 일이 이렇게 고된 일인 줄 몰랐다.
어릴 적에는 ‘밥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엄마에게 세 끼 밥상이 족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집안일은 보상이나 성취감도 없이 노동력만 소모하는 일이라 여겼다. 아마도 나는 살림이 지극히 수동적 행위라 오해했던 것 같다.
엄마의 살림 선생님은 할머니였다. 얼마나 무서운 선생이었는지! 엄마가 할머니에게 혼나며 쌀을 씻고 반찬을 만들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부엌에서 몰래 울던 모습도. 어쩌면 그래서 엄마는 내게 살림을 가르쳐주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내 딸은 다르게 살길 바라는 엄마의 바람과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나의 다짐이 만나 살림의 재능 없는 아이로 자랐다. 특히 할머니가 강조하던 ‘손끝이 야무진 여자’는 나와 거리가 멀었다. 아니, 사실은 일부러 모든 것을 망쳐놓기도 했다. 집 안에 갇힌 삶을 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다 보니 정말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됐다. 가만히 앉아 밥상을 받는 승리자. 그것이 가부장적 세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살림에 대한 무지와 무능의 최대 피해자는 나 자신이었다. 끼니를 대충 때우는 데 익숙했고, 조금만 바쁘면 집 안은 서서히 피로와 무관심이 쌓인 풍경으로 변해갔다. 사랑하는 이와 마주 앉아 정성껏 차린 밥 한 끼를 먹는 일은 미루면서 글 속에서만 사랑을 말했다.
살림에 대한 생각이 바뀐 건 여기, 춘포에 살면서부터다. 아침마다 집 앞을 말끔하게 쓸고, 마당과 텃밭을 가꾸는 할머니들을 보며 돌봄의 방식과 의미를 다시 배운다. 마당 귀퉁이에 세워둔 빗자루의 방향과 텃밭 식물의 간격, 고추를 말리다가 들여놓는 시각까지 모두 이유가 있다. 볕이 드는 자리에 있어야 할 것과 그늘에서 쉬어야 할 것이 있고, 노인 혼자 사는 집에서도 때가 되면 어김없이 밥 짓는 냄새가 난다. 그들이 매일 되풀이하는 일은 하루의 질서이고, 그 질서는 한 사람의 생을 만든다. 아흔 살 노인이 새벽부터 밭을 가꾸는 건, 그저 생산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질서와 리듬을 지키며 살아 있다는 증거를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살림은 누군가를 위한 희생이나 수동적 노동이 아니다. 나와 나를 지탱하는 환경을 주체적으로 가꾸고 돌보는 일이다. 밥상을 차리고, 집을 정리하고, 제철 음식을 장만하는 건 삶의 지속성을 만드는 가장 오래된 기술이기도 하다.
살림을 잘하고 싶다. 먹고사는 일에 정성을 다하고, 몸을 부지런히 움직일 줄 알고, 근원을 알 수 없는 욕망을 좇는 삶이 아니라, 하루를 제대로 돌볼 줄 아는 삶을 살고 싶다. 쓰는 손과 밥 짓는 손이 같은 온도와 정성으로 움직이길 바란다.
구석구석 내 손길이 닿은 보금자리와 속을 든든하게 하는 밥이 만드는 삶. 그런 삶으로 지은 글이라면, 누군가의 피로와 허기를 달래줄 수 있지 않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쓸까. 매일 묻고, 매일 연습한다. 손끝이 야무진 사람이 되기를, 그 손에서 잘 익은 무언가가 나오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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