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공간
출장용접 [서의동 칼럼]‘용미용중’이라는 나침반
- 이길중
- 25-11-07
- 4 회
핵추진 잠수함 도입은 ‘쾌도난마’식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사안이다. 뉴욕타임스는 핵잠 도입으로 “한국이 미국의 안보체계에 더 통합될 수 있다”고 했다. 미국의 대중국 견제에서 행동대장을 자처하던 윤석열 정부의 전철을 밟는 것 아니냐는 우려는 자연스럽다. 하지만 관행적 사고에서 벗어나면, 핵잠 도입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간주하는 트럼프의 대북접근법이 초래할 리스크에 선제 대응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은 핵보유국 인정을 북·미 대화의 전제로 삼고 있고, 북한의 핵무장이 불가역적인 단계에 와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트럼프가 이 전제조건을 수용해 북·미 협상에 나서는 것은 동북아 각국의 안보 우려를 높이고 ‘핵무장’ 목소리를 강화하는 결과를 빚을 수 있다. 한국의 핵잠 도입은 이런 안보 우려를 완전히 씻어내긴 어렵지만 상당 정도 낮출 수는 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도 핵잠 도입 계획을 밝힌 터이고, 미국은 동아시아 핵심 동맹국인 일본의 요구를 외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한국도 이 흐름에 선제적으로 올라타는 것이 고차방정식의 해법이 된다. 한국의 핵잠 도입은 트럼프의 북·미 협상 부담을 덜어주는, ‘페이스메이킹(pace making)’ 성격을 띠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핵잠을 언급하면서 “디젤 잠수함은 잠항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북한이나 중국 측 잠수함에 대한 추적 활동에 제한이 있다”고 보탰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1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기 직전에 나온 이 발언이 파장을 낳자 대통령실은 “특정 국가를 지칭한 것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이 대통령의 중국 언급이 말실수였는지 의도적으로 ‘긁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미국을 이용해 한국이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일깨운 효과는 있다.
사흘 뒤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 주석은 중국 IT기업 샤오미가 만든 스마트폰을 이 대통령에게 선물했다. 한국 기업이 만든 디스플레이가 장착된 제품이다. 서방의 제재 대상인 화웨이 대신 샤오미 제품을 선물한 것은 ‘미·중 사이에 낀 한국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한국과 협력할 의지가 있다’는 메시지로 보인다. 이 대통령은 샤오미 스마트폰을 살펴보다가 대뜸 “통신보안은 잘됩니까”라고 물었다. 통역을 들은 시 주석이 웃으면서 “백도어가 있는지 없는지 한번 보라”고 받자 이 대통령이 파안대소했다. 정상 인증 절차를 거치지 않고 디지털 기기의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는 백도어(backdoor)를 통해 화웨이가 정보를 빼낸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중국의 아픈 곳을 농담 삼아 쿡 찌르며 ‘11년의 벽’을 허무는 이 대통령의 솜씨, 그것을 기민하게 받아 ‘캐치볼’을 완성한 시 주석의 노련함은 APEC 정상회의의 ‘원픽(one-pick)’ 장면이었다.
경주에서의 이 대통령은 유쾌함과 다정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영리하게 할 말을 다 하는 외교 기량을 발휘했다. 핵추진 잠수함을 둘러싼 논란과 우려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핵잠 보유가 한국의 안보 자율성을 높일지, 동북아 긴장만 초래할지도 현재로선 가늠하기 힘들다. 다만, 한국이 갈수록 험난해지는 동북아 안보 질서에서 ‘독립변수’ 혹은 ‘능동적 행위자’로 나서는 상황이 전개되는 것은 주목할 일이다. 조 바이든의 ‘노룩(No look) 악수’는 윤석열 개인에 대한 ‘호불호’도 작용했겠지만, 대미·대일 일변도의 ‘알기 쉬운 외교’였던 탓도 있을 것이다. ‘한국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국제사회가 대통령의 입을 쳐다보는 외교가 오랜만에 펼쳐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일은 한밤에 북극성을 바라보며 노를 젓는 일만큼 어렵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남북 화해를 통한 동북아 평화’라는 나침반으로 대미·대중 외교를 전개했다. 이 대통령은 ‘용미용중(用美用中)’의 나침반으로 새 항로를 개척해 나가려는 듯 보인다. APEC 정상회의는 그 가능성을 선보였다.
한·미 관세협상 결과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민주당은 명비어천가를 부르고, 국민의힘은 아무 말 대잔치다. 내란 잔당의 정부 비난은 너무 저열해서 “한국의 우익에게는 이념이나 사상이 없다”던 어느 학자의 수년 전 비평이 새삼 떠오를 정도다. 전문성도 수권 능력도 남아 있지 않은 구체제 세력이 지금이라도 트럼프 반대 투쟁에 나선다면 최소한의 일관성은 인정해줄 만하다. 분명한 사실은, 이 말도 안 되는 120년 만의 을사국치 협상은 트럼프 제국주의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최악 대신 차악을 ‘윤허’받고 기뻐하는 민주당의 자화자찬은 위선이다. ‘노 딜’이 낫다며 권력 주위를 맴돌다가, 선방했다며 태세 전환한 소위 전문가들은 참혹할 지경이다.
이제라도 협상 결과의 위험 요소를 정확히 짚고 대응 방안을 모색할 때다. 한국 정부의 2000억달러 대미 투자에 약정 기한과 집행 기간이 구분되어 있다는 점부터 조심해야 한다. 투자 대상 사업을 확정하고 약정을 체결하는 기한은 트럼프 임기가 끝나는 2029년 1월이다. 달러 자금이 유출되는 집행 기간은 사업의 기성(진척 정도)에 따라 10년보다 길어질 수 있다. 결과적으로는 2000억달러 전액이 미국에 투자된다.
투자 수익의 분배에 관해 한국은 원금을 못 건진 상태라도 수익의 절반밖에 가져오지 못하지만 미국은 한 푼도 투자한 것 없이 수익의 절반을 챙긴다. 원금 회수 후 미국 몫은 더 늘어날 듯하다. 기실 사업성이 양호한 자국 내 투자 사업이라면 미국 자본이 알아서 투자하려고 들 것이다. 한국에 배정되는 대미 투자는 수익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나머지 사업일 공산이 크다.
정부는 20년 이내에 원금 회수가 어렵다고 예상되는 사업의 경우 수익 배분 비율을 조정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20년이라는 회임 기간은 모든 투자 대상에 일괄 적용하기에는 너무 길다. 투자 사업이 실패할 때 원금 회수의 현실적인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다. 표면상 우리 측 동의로 ‘상업적 합리성’ 원칙에 따라 추려진 사업이니 미국으로서는 신용 보강을 제공할 이유가 없다. 상업적 합리성의 검토에 있어서도 막상 결정권을 가진 투자위원회는 미국이 위원장을 맡는다. 돈을 대는 한국이 위원장을 맡는 협의위원회가, 미국의 요구가 일방적으로 관철되는 통로로 전락하지 않고 투자위원회로부터 독립적으로 작동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협상 결과의 경제 효과에 대한 우려도 지울 길 없다. 천문학적인 규모로 미국에 자금을 바치는 마당에 산업공동화와 재정 자원 손실이 걱정된다. 반도체, 자동차, 조선 등 한국의 10대 제조업에서 국내 투자는 2023년과 2024년에 800억달러를 초과했다. 이번에 합의된 3500억달러 대미 투자는 그 4배를 넘는다. 주력 산업의 국내 투자 4년 치보다 많다. 2020~2024년 한국의 대미 직접투자는 연평균 206억달러였다. 이번에 연간 한도 200억달러 규모의 정부 투자만 더해도 전체 대미 투자는 두 배가 된다. 지난달 29일 백악관 발표 ‘팩트시트’에 따르면 항공·방산, 에너지·원자력 등 분야에서 한국 자본의 현지 투자만도 수백억달러에 이를 예정이다. 여기에 7월 말 현대차, SK 등의 자동차, 반도체 등 투자 약속이 추가된다. 한국 자본의 국내 투자 여력이 줄어들지 않을 재간이 없다. 이로 인해 장기적으로 국내 산업 구조에 공백이 만들어질 수 있다. 정부의 대미 투자도 가용 재정 자원을 포기하면서 이루어지기에 위축된 공공서비스 공급을 확충할 기회가 상실되는 셈이다.
작년 말 외환보유액 중 달러 자산은 약 3000억달러다. 원래 외환보유액 운용 수익은 외환보유액으로 쌓인다. 반면 운용 수익을 인출해 딴 데 쓰면, 늘어나야 할 외환보유액이 늘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정부 대미 투자는 외환보유액을 사실상 줄인다. 운용 수익은 변동성이 크다. 2022년 이후 미국 금리 인상을 배경으로 운용 수익이 늘었지만 계속 그런다는 법은 없다. 2014~2024년 10년간 외환보유액 증가가 520억달러에 그쳤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결국 외화자금을 별도로 조달해야만 할 것이다. 한국 경제는 앞으로 10년 넘게 매년 쌓이는 달러 빚을 노예처럼 갚아야 한다.
경상수지가 작년에는 1000억달러였지만 2022년이나 2023년은 300억달러에 그쳤다. 향후 무역 질서 재편과 글로벌 공급망 변화로 인해 그 가변성은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런 가운데 외환보유액 운용 수익 유출과 대미 투자 기금의 채권 발행이 반복되므로 한국 경제의 대외적 불안정성은 확대되기 쉽다. 상전한테서 차악을 윤허받았다고 기뻐할 때가 아니다.
경기 용인시 최초의 독립서점인 ‘책방 우주소년’을 방문했다. 이 서점은 용인시 동천동 주민들의 마을 만들기 중심 공간으로, 여러모로 감탄할 만한 훌륭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나의 감동은 같이 간 지인이 “왜 하필 ‘소년’이냐, ‘우주소녀’는 없나?”라고 지적하면서 작은 논쟁으로 이어졌다. 나는 페미니즘이 ‘소년’을 ‘소녀’로 대체하는 사유가 아니라고 말했다. 물론 남성 명사가 인간을 대표하는 것은 문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여성의 언어를 포함해 모든 명명(命名)은 누군가/무엇인가를 배제하는 현실에 대한 문제 제기다.
그즈음 지역 문예지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최근 대학의 강의실에서는 ‘페미니즘’이나 ‘젠더’라는 기표 자체가 마치 ‘얼음땡’ 놀이의 ‘얼음!’ 같은 단어로 작동하는 듯 보입니다. 앞선 단어들이 발화되는 순간 모든 학생이 눈만 크게 뜬 채로 굳어버리는 광경을 여러 번 목격한 바 있는데요. 이런 상황은 2015년의 페미니즘 대중화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여기의 우리가, 이전보다 나아진 것·그대로인 것·오히려 더 나빠진 것 등을 섬세하게 성찰할 필요를 일깨웁니다.”
성차별은 전혀 해소되지 않고 있는데, ‘페미니즘’만 모두를 긴장시키는 말이 되었다. 나 역시 대화, 토론 그리고 글쓰기에서 기피하는 주제가 있다. 대개는 여성주의 ‘내부’의 문제들이지만, ‘조국 사태’ 같은 이슈도 되도록 입장 표명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나마 ‘조국 사태’는 여기 지면에 쓸 수라도 있는 주제다. ‘말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없는 문제도 수두룩하다. 인간관계가 파괴되고 관점 차이만 확인하게 되는 대화 소재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중요한 사회적 의제가 금기시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다.
당대 페미니즘은 남녀 간, 세대 간에 가장 첨예한 정치경제학이자 대화 주제인데도 실제로는 제대로 논의되지 않는 대표적 이슈가 아닌가 생각한다. 낙인, 자기 검열, 분노와 긴장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몸이 굳어버린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여성주의에 대한 오해가 가장 크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누가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를 생산했을까? 아니, 페미니즘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이 오해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여성, 남성, 페미니스트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니다. 어차피 대화는 말이 변화하고 유동하는 행위이고 모든 언어는 오염되어 있다. 그러므로 가부장제 사회에서 젠더에 대해 말한다? 투명한 전달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는 불가피
나는 평소 ‘여성’도 ‘학자’도 아니고 페미니스트로서 정체성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여성주의든 민족주의든 나는 그 어떤 ‘ ~주의(主義)’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잠시 작동하는 정체성의 정치의 효능에는 동의하지만, 정체성의 정치 자체에는 반대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페미니즘은 정체성의 정치가 아니다.
당연히 나의 페미니즘에 대한 입장도 수많은 여성주의적 견해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동시에 ‘나의 페미니즘’은 내가 가진 많은 가치관 중의 하나일 뿐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페미니스트가 될 필요도 없고, 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은 시민들이 가져야 할 하나의 교양이나 가치관이지, 한 사람이 가져야 하는 모든 정치적 태도가 될 수 없다.
다만 페미니즘은 모든 타자(他者·the others)들의 사상으로서 그 장점이 분명하다. 페미니즘은 글쓰기와 공부, 인간관계, 개인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 1949년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제2의 성(The Second Sex)>에서 여성은 ‘제1의 성’인 남성이 만든 두 번째 성, 이등 시민이라고 주장했다. 동의하지만, 내가 지향하는 것은 남성과 평등한 제1의 성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일단, 이 목표는 ‘어떤 남성’과 같아질 것인가의 물음 앞에서 불가능한 임무가 된다.
내가 지향하는 페미니즘은 타인을 자신을 설명하기 위한 부수적인 존재로 동원하는‘백인 남성’의 사고방식을 따라 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제2의 성’으로써 또 다른 타자들, 이를테면 ‘제3의 성(아줌마, 난민, 이주민…)’을 만드는 데 동참하지 않는 실천이다.
페미니즘은 세상을 인식하는 다른 ‘눈’이다. 페미니즘은 ‘눈’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보는 것은 곧 아는 것”이라는 시각 감각의 특권을 문제시한다. 이래저래 모순일 수밖에 없는 사유다.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고 외치지만, 이 말 역시 문제적인 언설일 수밖에 없다. ‘어떤 여성’의 눈으로 볼 것인가? 가난한 여성, 중산층 여성, 장애 여성, 비장애 여성, 이성애자 여성, 동성애자 여성, 나이 든 여성, 여성 난민, 트랜스 여성? 페미니즘은 자신이 어떤 여성인지 사회적 위치성을 드러내고 그 인식의 부분성을 인정하는, 매 순간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과정이다.
이 때문에 개별적으로 몇몇 여성이 남성의 세계에 진입할 수는 있어도, 페미니즘은 ‘주류’ 사상이 될 수 없다. 페미니즘은 아무도 뒤에 남겨두지 않는 <가장 느린 정의>(리아 락슈미 피엡즈나-사마라신하 지음, 전혜은·제이 옮김, 오월의봄, 2024)를 원한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삶과 경험이 보편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보편성이 백인 남성의 삶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기왕의 모든 언어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경험일 뿐이라고 상대화하는 것이다. “네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야, 그러나 그건 네 생각일 뿐이야.”
페미니즘은 보편성의 반대는 특수성이 아니라 차이라고 본다. 보편성은 말 그대로 기준이 하나라는 뜻이다. 보편성의 반대가 특수라면, 즉 보편성으로 포섭되지 않는 특수한 것이 있다면 이미 보편성은 불가능한 것이 된다. 세상사는 보편성으로 포섭, 환원되지 않는 수많은 현실들로 이루어졌다. 차이는 끊임없이 보편을 재구성하므로 보편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배제되는 이들의 목소리에 의해 그 모양을 달리한다. 이것이 다양한 목소리의 화음,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이라는 통념만큼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도 없을 것이다. 아니, 이는 오해를 넘어 폭력이다. 민주주의는 배제 없는 세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차이가 여성주의의 자원
페미니즘은 다양성을 지향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의 구호 중 하나는 “페미니즘은 다양성이 아니다!(feminism is not diversity!)”이다. 페미니즘은 다양성을 존중하되, 당파성 없는 다양성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극우, 반동성애주의, 여성 혐오를 다양성이나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다. 나와 다른 입장을 상대화하는 태도와 상대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다르다. 상대주의는 자기가 선 자리, 입장을 드러내지 않는 사고방식이다.
마르크스주의 실현이 ‘실패’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가진 억압성 즉 여성과 ‘유색 인종’ 노동자를 배제한 백인 남성 중심의 노동자 모델이 가장 큰 문제였다. 노동자들 사이의 차이(차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비해 페미니즘은 여성들 간의 차이를 핵심 사상으로 한다. 여성들 간의 차이는 보편적 이론으로서 여성주의를 ‘불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여성주의의 가장 큰 자원이자 이론적 근거이다.
여성주의가 혐오, 비생산적인 갈등, ‘손잡고 침묵’하는 집단 무의식을 극복하고 일종의 인식론적 도구로서 활용되기를 희망한다. 여성주의는 맥락적 사유라는 점에서 원칙이 없다. 이론도 하나의 담론적 현실이라는 의미에서 이론과 현실의 경계도 없다고 본다. 상황에 맞게 계속 사유하고 매 순간 새로운 언어를 찾아야 한다.
페미니즘은 현실에 ‘적용’하는 이론이 아니다. 나는 “서구 이론을 한국 사회에 적용한다”는 태도 같은 식민주의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때 한국 사회는 언제나 서구의 자료, 데이터에 불과하게 된다. 현장, 지역성(로컬리티) 자체가 이론이다.
여성과 남성, 모든 이들의 무지가 해방되기를 꿈꾸는 페미니즘이 갈등과 극도의 긴장 속에서 침묵되는 현실은 안타까운 일이다. 페미니즘은 나를 알고 너를 알고 세상을 아는 수많은 방법 중 하나다. 사람들마다 입장에 따라 유효성은 차이가 있겠지만, 페미니즘은 멈춤 없는 사유라는 점에서 상당히 쓸모 있는 ‘아는 방법, 사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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