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공간
폰테크 ‘대문자 I’도 ‘파워 E’가 되는 시간…바다 위 리조트, 크루즈 여행
- 이길중
- 25-06-23
- 122 회
느림과 바쁨의 아이러니
지난 5월25일 저녁, 롯데관광의 전세선 코스타 세레나호가 부산항을 출발했다. 대만 지룽을 거쳐 일본 사세보에 들렀다 돌아오는 5박6일간의 여정이었다.
배에 올라 가장 먼저 한 일은 ‘선상 신문’을 읽는 것이었다. 매일 새벽 객실 앞으로 배달되는 이 신문에는 당일의 프로그램과 공지사항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몇몇 프로그램에 동그라미를 치며 의외로 입체감 있는 날들을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이 솟는다.
“크루즈 여행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여행 인솔자 김정희씨의 말을 떠올리며 용기를 내 참여한 첫 프로그램은 솔레 중앙 수영장 앞 광장에서 진행된 ‘그룹 댄스’였다. 수줍어하거나 낯을 가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미 흥이 ‘완충’된 상태였다.
음악이 시작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각자의 리듬으로 몸을 흔들었다. 스피커를 뚫고 나올 것 같은 음악 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질 즈음, 뒷줄에 서 있던 여행객 정정희씨(62)가 손수 멘토를 자처하더니 내게 소리쳤다. “아니, 이렇게, 방댕이(엉덩이)를 더 흔들어!”
멘토에게 가르침까지 받은 마당에 좀 더 적극적으로 놀아보기로 했다. 바다가 훤히 보이는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을 밟고 기억력 게임, 빙고, 모자 뺏기 게임까지 빠짐없이 참여했다. 경쟁심에 불이 붙어 결승전까지 올랐다. 아이들보다 먼저 야외 미끄럼틀을 타고 깔깔 웃다가 100m 길이의 선상 트랙 위를 조급함 없이 걸으며 긴장을 풀었다. ‘크루즈는 은퇴한 부모님 세대의 것’이라는 고정관념도 조금씩 흐려졌다.
때론 넘치는 에너지와 요란한 분위기에 한숨 내쉴 곳이 필요했다. 그럴 때면 자연스레 갑판으로 향했다. 바다를 마주한 의자에 앉아 몇 달째 펼치지 못했던 소설책을 완독했다. 때로는 목적지를 찾아다니느라 분주한 여행 대신 파도 위에 머무는 이 여유야말로 진짜 쉼처럼 느껴졌다.
선내에서의 유일한 위기는 ‘길치 DNA’가 발동하는 순간이었다. 11만4500t 규모, 길이 290m에 달하는 코스타 세레나호는 14층, 1500개 객실, 최대 37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크루즈다. 복도는 어디나 비슷했고, 창밖은 수평선뿐이었다.
무너진 방향 감각을 회복하려면 이성과 직관을 총동원해야 했다. 식당을 찾아 헤매던 중 스마트워치엔 어느새 ‘오늘의 운동량 충족’ 메시지가 떴다. 곳곳에서는 ‘길 잃은 동지들’이 목격되기도 했다.
그러려니, 타이베이
정신없이 1박2일을 놀다 보니 첫 번째 기항지인 대만의 지룽항에 도착해 있었다. 하선 후 기항지 투어로 도착한 곳은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이었다.
국민당 정부가 내전을 피해 대만으로 옮겨온 70만점 이상의 문화재 중 약 1%만이 전시되어 있지만, 그 1%가 주는 밀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곳의 대표 스타 ‘옥배추’와 ‘육형석동파육’을 맨눈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다.
이어 시먼딩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만의 명동’이라 불릴 만큼 북적이는 번화가였다. 현지 인솔자 초미미씨는 대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러려니’라는 단어를 품어야 한다고 했다. 성에 차지 않아 보여도 그러려니 하다 보면 기대 이상의 감동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려니’ 하며 걸어 다닌 시먼딩은 번화함과 소박함이 공존하는 독특한 활기로 가득한 도시였다. 소규모 편집숍, 레트로 CD 가게, 직접 그림을 그려주는 캐리커처 부스, 무심한 듯 자리한 헌책방까지 정돈되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동네였다. 바느질 선이 삐뚤빼뚤 살아 있는 천 조각처럼, 이 거리도 그렇게 정겹고 생기 있었다. 이곳에서는 무엇을 하든 즐거울 것만 같다.
고요한 시간 여행, 사세보
또 하루의 ‘종일 항해’를 마치고 도착한 두 번째 기항지는 일본의 사세보다. 이곳에서는 고즈넉한 시골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유토쿠 이나리 신사를 찾았다. 이나리는 벼의 신으로 농사, 풍요, 성공을 관장한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붉은 기둥이 끝없이 이어지는 통로가 나왔다. 산허리를 감싸며 펼쳐진 이 붉은 터널은 마치 현실과 비현실을 잇는 문 같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일상의 번잡함은 멀어지고 마음 깊은 곳에 고요한 평화가 스며들었다.
다음 목적지는 사세보의 아리타 포세린 파크였다. 사가현 아리타에 자리한 이 테마파크는 독일 드레스덴의 츠빙거 궁전을 본뜬 웅장한 유럽풍 건축물과 아리타야키 도자기의 정교하고도 깊이 있는 세계가 이질감 없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공간이었다.
공원 한쪽에는 층층이 쌓인 노보리 가마(도자기 가마)가 고요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 곁을 따라 걷다 보니 수백 년 전 흙과 불을 다루던 한국과 중국, 일본 장인들의 숨결이 문득 전해지는 듯했다. 과거와 현재가 조용히 마주하는 시간에 감탄이 절로 났다.
배로 돌아와 맞이한 선상의 마지막 밤, 여행이란 단순히 머무른 장소의 풍경이 아니라 그 속에서 쌓아 올린 시간과 마음의 흔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느림과 바쁨이 교차했던 낯선 공간에서 나는 조금 다른 속도로 숨 쉬는 법을 배웠다. 별일 없이 유쾌했던 여정이었고, 그래서 더 좋은 여행이었다.
경북도는 집중호우와 태풍 등 복합재난에 대비해 주민의 자발적 대피를 유도하기 위한 ‘우리마을 대피왕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고 20일 밝혔다.
이 프로젝트는 지난해부터 추진해온 경북형 주민대피 시스템인 ‘K-마어서대피 프로젝트’를 고도화하는 것이다. 대피 횟수에 따른 혜택 제공, 문화 치유와 심리회복 프로그램이 더해졌다.
경북형 주민대피시스템은 ‘12시간 사전예보제’ ‘1마을 1대피소 운영’ ‘마을순찰대 운영’ ‘주민대피협의체 구축’ 등으로 구성됐다. 민·관이 협력하는 전국 유일의 주민중심형 재난 대응 모델이다. 2023년 7월 극한 호우로 인해 당시 경북에서만 25명이 사망하고 2명이 실종되는 등 인명피해가 발생한 이후 만들어졌다.
프로젝트 핵심은 대피 멤버십 운영이다. 마을순찰대가 주민들의 대피 횟수를 체크하고, 대피 횟수에 따라 폭염 대비 안전 물품을 단계적으로 지급한다. 대피 1·3·6회를 완료한 주민들에게 폭염안전키트, 쿨토시, 냉감바지 또는 티셔츠 등을 주는 방식이다.
또 ‘대피왕’과 대피를 가장 잘한 ‘대표대피소’ 선발을 통해 대피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확산시킨다.
산불 피해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문화 치유·심리회복 프로그램도 운영된다.
문화 치유프로그램은 경북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와 협력해 13개 팀으로 구성된 예술인들이 98개 대피소에 방문해 국악·클래식·성인가요 등 다채로운 공연을 펼친다.
심리회복 프로그램은 60명의 심리상담 활동가들이 30개조로 구성돼 총 180개의 대피소를 방문, 집단 및 개별 상담을 제공한다.
경북도 관계자는 “12시간 전에 사전대피를 하다 보니 일부 어르신들이 불만을 제기하는 종종 있었다”며 “대피소에서 간식을 먹으며 공연을 보는 등 대피가 즐거운 일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의료장비와 병상, 집기가 모두 사라진 병원은 컴컴했다. 광주 남구 덕남동 광주시립제2요양병원(시립2요양병원)에서 만난 김승연씨(39)는 ‘담당 간호사’ 이름이 비어있는 병실 출입문 안내판을 만졌다.
이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김씨는 “환자들이 ‘고맙다’고 말해 주시면 시립병원 직원이라는 자부심에 뿌듯했다. 멀쩡했던 공공병원을 폐업한 잘못을 끝까지 밝히겠다”고 했다.
시립2요양병원은 지난 2023년 12월 31일 문을 닫았다. 병원 노동자들은 광주시의 공공의료 포기에 대해 책임을 묻겠다며 1년6개월째 텅 빈 건물을 지키고 있다.
22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전국에 설립돼 운영 중인 공립요양병원 77곳(2022년 기준) 중 ‘적자로 인한 위탁 불발’을 이유로 문을 닫은 것은 광주가 처음이다.
광주시는 지난 2013년 9월 고령화에 대비하고 치매 및 노인성질환 환자를 위한 지역 진료인프라 구축을 위해 시립2요양병원을 개설했다.
전남대학교병원이 위탁을 맡으면서 병원은 빠르게 성장했다. 병상규모도 196개로 늘어났다. 경영도 차츰 안정되면서 2019년 광주시가 병원에 지원한 운영손실금은 연간 2억7000만원 정도에 불과했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가장 발빠르게 대처한 곳도 시립2요양병원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폐업이었다. 시립2요양병원은 코로나19가 대유행하던 2022년 2월 시에서 감염병전담병원으로 지정하자 20여일 만에 시설을 전환, 10개월 동안 코로나 환자 51명을 치료했다.
이후 코로나19 전담병원 지정이 해제됐지만 문제는 그 당시 급하게 병원을 옮겨야 했던 환자들의 절반이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이었다. 병원은 큰 손실을 입었다. 간호사로 일했던 김수형씨(49)는 “언제든지 병원을 옮겨야 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재입원을 꺼린 것”이라고 했다.
전남대병원은 광주시에 ‘적자 일부 지원’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2023년 재계약을 포기하겠다고 밝혔다. 시는 이후 4차례 공모를 진행했지만 새로운 위탁기관을 찾지 못하자 2023년 12월 병원을 폐업하고 운영을 종료했다.
전국 모든 공립요양병원은 광주처럼 위탁으로 운영된다. 그런데 위탁할 의료기관을 찾지 못해 폐업한 것은 광주가 유일하다. 병원 폐업 이후 광주시는 매년 건물 관리 등을 위해 수억 원의 예산도 지출하고 있다. 올해 예산은 1억2900만원이다.
60여 명의 병원 직원들도 일자리를 잃었다. 시립2요양병원 노조의 조사를 보면 폐업 이후 25명이 취업을 위해 광주를 떠났다.
하지만 남은 이들은 ‘공공의료 회복’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지금도 24명이 조합비를 내며 매주 수요일 병원에 모여 ‘1인 시위’ 등을 이어가고 있다. 법원에는 ‘폐업 처분 무효확인 소송’과 ‘부당해고 및 부당노동행위 구제’ 소송도 제기했다.
이에대해 광주시는 “‘적자 보전’까지 제시하며 4번이나 공모를 했지만 수탁자를 찾지 못해 폐업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현재 병원 건물 활용방안에 대해서는 확정하지 않았지만 재개원은 어려운 상황”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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