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공간
[전문가의 세계 - 이종필의 과학자의 발상법] 인간성·작가정신이 만든 ‘지금의 한류’…자본 논리로부터 창작자들 지켜야 지속 가…
- 이길중
- 25-07-22
- 7 회
‘기업 출신’ 문화·과학 수장 후보들 향한 우려 시선 불식하려면현장 목소리 경청하고 기초과학 등 근본적인 분야에 관심 가져야
6월 기말고사가 끝나고 학생들 성적을 처리하면서 힘들었던 내게 큰 위안이 된 두 작품이 있었다. 넷플릭스에서 일주일 간격을 두고 공개된 <케이팝 데몬 헌터스>와 <오징어 게임> 시즌3였다. (이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다.) 호불호가 극명하게 엇갈렸던 <오징어 게임> 2·3편이 내게는 세 가지 층으로 중첩된 게임으로 다가왔다.
첫 번째 층위의 게임은 게임장에서 거액을 놓고 벌어지는 참가자들 사이의 ‘오징어 게임’이다. 2·3편의 게임장이 1편의 게임장을 그대로 답습했다는 점, 1편에 비해 게임장 내부와 외부의 유기적인 연결이 부족했다는 점, 그에 따라 참가자들 개개인의 사연과 서사가 평면적이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3편의 게임들은 두 번째 및 세 번째 층위의 게임을 펼쳐놓기에 아주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
두 번째 층위의 게임은 성기훈과 프런트맨 황인호(이병헌)의 게임이다. 오징어 게임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참가자들이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생존을 위해 이타심을 버려야 한다. 돈과 생존 앞에 무너지는 인간성, 그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밑바닥 모습을 VIP들이 보고 즐기는 것이 게임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성기훈 같은 참가자가 많으면 오징어 게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게임판을 운영하는 프런트맨의 처지에서는 구원자가 된 듯한 성기훈의 ‘영웅 놀이’가 마뜩잖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황인호는 성기훈을 물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굴복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 봐야 너도 별수 없는 인간 아니냐?”라는 점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마지막 게임을 앞두고 성기훈에게 칼을 건넨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런데도 왜 성기훈은 황인호의 제안을 거절하고 결국 마지막에 비극적인 선택을 했을까? 그것이 성기훈에게는 황인호와의 게임에서 이기는 길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기훈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 “사람은…”을 통해 그는 짐승으로 살기보다 사람으로 죽기를 선택했다.
지금처럼 삶의 모든 가치가 돈과 자본의 논리로 획일화된 세상의 기준으로는 성기훈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다.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황인호의 말을 듣는 것이 더 유리할 것이다. 문득 나는 대학교 1학년 때 유행했던 운동권 노래의 한 자락, “내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대목이 떠올랐다. 아무리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라고는 하지만 자본의 논리로 환원되지 않는 가치가 있음을 우린 너무 오래 잊고 지낸 건 아닌지 모르겠다.
두 번째 층위의 게임에서의 성기훈의 선택은 마지막 층위의 게임에서 이 드라마를 만든 황동혁 감독의 선택과도 닮은 것 같다. 황 감독은 왜 할리우드 스타일의 익숙한 결말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할리우드에 익숙한 해외 시청자 중에는 할리우드 문법을 완전히 전복시킨 황 감독의 결말에 당황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새로운 2·3편을 앞두고 많은 시청자는 성기훈이 게임판을 어떻게 뒤엎고 프런트맨을 응징할 것인지에 기대가 컸다. 그러나 그런 익숙한 흥행 법칙은 드라마 속 오징어 게임을 작동시키는 법칙과 본질에서 똑같다.
황 감독은 다른 게임의 규칙으로 다른 가치를 제시했다. 그의 결말은 자신의 드라마 속 성기훈의 선택과 일맥상통해 보인다. 이 세상에는 돈과 자본의 논리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가치가 있음을 성기훈의 비극적 선택을 통해 이중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넷플릭스라는 거대자본의 가장 큰 수혜자 중 한 명인 황 감독이 그 머니게임의 규칙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메시지를 고집한 선택 자체가 오징어 게임 속 구도와 너무 닮았다.
언뜻 성기훈과 황 감독의 선택이 무모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때로는 무모해 보이는 선택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강력한 일본제국의 군대에 맞서 총을 들고 저항했던 의병들과 독립군들, 계엄군에 맞서 도청을 끝까지 지켰던 광주 시민들, 생존과 실리가 아닌 더 큰 가치를 선택했던 그분들 덕분에 우리는 독립을 맞을 수 있었고 수십 년 뒤의 내란 쿠데타를 진압할 수 있었다.
<오징어 게임>과는 전혀 다른 장르인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도 성기훈과 비슷한 선택을 한 인물인 진우를 만날 수 있다. 어린이 시청 가능 애니메이션에서 주요 등장인물이 비극적으로 희생하는 장면을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기대하고 예상했을까? 영화 속 진우의 선택은 성기훈만큼이나 언뜻 이해하기 어렵고 당황스러울 수 있으나, 아마도 진우 또한 하루를 살더라도 온전한 자기 자신의 본모습으로 살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설정을 포함해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디즈니나 픽사 등의 애니메이션 문법에 익숙한 서양 시청자들에게 매우 색다르게 다가갔을 것 같다. 무엇보다 인물들에게 감정적으로 동조하는 시청자들이 많다. 이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한국드라마의 여러 요소를 직간접적으로 차용한 덕분으로 보인다. 한국드라마는 특히 감정의 ‘빌드업’을 섬세하게 잘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단순한 이야기 구조가 지루하게 흐르지 않고 오히려 익숙하면서도 흡인력과 집중력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은 감정의 공명이 컸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다 세련된 색감과 완성도 높은 음악, 각종 한국적 요소들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냥 사람들에게 나쁜 해만 끼치는 서양 악령들과 달리 한국의 악령은 나름의 서사와 한을 가지고 있어 그 한이 풀리면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다. 해외 시청자들이 진우를 추모하는 공간을 오프라인에 직접 만들 정도로 열광하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네 한의 정서가 그들에게도 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침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전례 없는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는 와중에 문화정책을 총괄할 새 정부의 주무장관이 지명되었다.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은 최휘영 후보자를 소개하면서 “기자와 온라인 포털 대표, 여행 플랫폼 창업자 등 다양한 분야의 경력과 경험을 보유하고 계신 분”이라며 “민간 출신의 전문성과 참신성을 기반으로 K컬처 시장 300조원 시대를 열겠다는 대통령의 구상을 현실로 만들 문화체육관광 분야의 새로운 CEO”라고 소개했다.
한국 영화와 한국드라마의 열렬한 팬인 입장에서 보자면, 콘텐츠 창작활동과는 거리가 멀고 문화산업의 유통 분야에 종사했던 사람이 문화부처 수장이 되는 게 과연 적절한지 의문이다. 비서실장의 소개말에서 드러났듯이 여전히 문화를 돈벌이를 위한 수단으로만 인식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돈벌이 전문가’를 앞세운 게 아닌가 걱정이 앞선다.
대통령 선거 전인 지난 5월 나는 이 지면을 통해 당시 이재명 후보의 문화예술인 관련 공약이 ‘경제·산업’ 항목에 포함된 사실을 지적하며 문화예술인을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시킬 가능성을 우려했었다. ‘300조원 시대’를 열겠다는 문체부 장관 지명의 변을 보며 나의 이런 우려는 점점 더 현실에 가까워진 느낌이다.
문화운동단체인 ‘문화연대’에서도 지난 11일 자로 최휘영 지명에 우려를 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관광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제외하고 문체부 정책 영역의 다른 부분에 대해 과연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을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통합적인 문화정책 수립과 추진에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이유에서이다.
미국의 보잉사가 고급 엔지니어들을 배척하고 재무 전문가들을 앞세워 숫자 관리에만 몰두하다 항공기 안전 관련 기술적 신뢰를 잃었다는 세평이 떠올랐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반도체의 상전벽해 이면에도 엔지니어에 대한 태도의 차이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빅테크 기업에서 엔지니어가 중요하듯 문화계에서는 창작자의 시각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마음껏 자신의 작품을 만들고 그 결과를 공개할 기회와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 300조원 시장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시장이라는 것은 자본의 논리에 따라 돈만 된다면 업체들이 300조원이든 400조원이든 만들 수 있지만, 정부는 시장이 돌보지 않는 풀뿌리 창작자부터 먼저 돌봐야 한다.
‘유통업자’ 출신의 장관이 한류 300조원 시대를 열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그 300조원이 누구를 위한 돈인지, 얼마나 지속 가능한 것인지는 더 큰 의문으로 남게 될 것이 확실하다. ‘창작자’의 관점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뉴진스 같은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아이돌도 어른들 싸움의 틈바구니에서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게 자본주의의 냉혹한 현실이다. 정부가 공공의 이름을 걸고 있어야 할 곳은 ‘업자’의 편이 아니라 ‘창작자’의 편이다.
성기훈을 통해 게임의 법칙을 거부했던 황동혁 감독이 추구했던 가치는 돈과 자본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들, 말하자면 인간성과 작가정신이었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 자체가 반자본주의적이다. 그 덕분에 지금의 한류가 가능했다. 드라마나 영화 제작 현장의 ‘판돈’은 커졌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다양한 작품이 만들어지지 못하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런 현실에서의 문체부 장관이라면 황 감독 같은 창작자들의 고집을 가장 우선으로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주제넘게 잘 알지도 못하는 문화 분야에 이렇게 걱정을 앞세우는 이유는 과학 분야도 근본적으로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기초과학은 자본의 논리가 우선으로 작동하지 않는, 아니 작동해서는 안 되는 분야이다. 이런 점은 문화계와 무척 닮았다. 대통령실에 신설된 AI 수석에 이어 과기정통부 장관에까지 기업 출신의 AI 전문가가 등용된 까닭에 AI로 치환되지 않거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들이 방치되고 훼손되는 건 아닌지 어쩔 수 없이 염려하게 된다. 부디 나의 걱정이 섣부른 기우로 끝나길, 신임 장관 후보자들이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 곳의 목소리부터 더 잘 챙겨 듣기를 기대한다.
택시기사를 흉기로 살해한 뒤 피해자의 택시를 몰아 도주하면서 사람들을 치어 다치게 한 20대가 구속 기소됐다.
수원지검 형사3부(부장검사 이동현)는 살인, 살인미수, 절도 등 혐의로 A씨(21)를 구속기소 했다고 21일 밝혔다.
A씨는 지난달 26일 오전 3시 27분쯤 화성시 비봉면 삼화리 한 도로에서 60대 택시 운전기사 B씨를 흉기로 찌른 뒤 택시를 훔쳐 달아난 혐의를 받고 있다. B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A씨는 도주 과정에서 마을 주민 2명을 잇달아 쳐 각각 골절과 타박상을 입힌 혐의도 받는다.
A씨는 범행 1시간여 뒤인 오전 4시 40분께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서 “바퀴 없는(펑크 난) 차량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신고를 받은 남태령지구대 소속 경찰관들에 의해 긴급체포됐다.
A씨는 자신이 알려준 대로 B씨가 운전했으나 목적지가 나오지 않아 30분간 헤매자 실랑이 끝에 B씨를 상대로 범행한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철도공사(코레일)은 남부지방 극한호우로 조정된 열차 운행을 20일 오전 9시부터 재개한다고 밝혔다.
전날부터 일부 구간 운행이 중지됐던 경부선 일반열차, 경전선, 호남선은 전 구간 모든 열차가 정상 운행한다. 코레일은 “침수 피해 발생 구간에 대한 긴급 보수작업과 안전 점검을 완료했다”고 밝혔다.
단, 교외선은 이 지역 강수량 증가로 시설물 피해가 이어져 복구 및 시설물 점검 후에 운행을 재개하기로 했다.
이날 오전 경기도 의정부시와 고양시를 연결하는 교외선 선로에 토사가 유입돼, 전 구간에 대한 열차 운행이 중단됐다.
앞서 지난 19일 남부지방에 많은 비가 쏟아지면서 오후부터 호남선 광주송정역~목포역 고속열차(KTX), 익산~목포역 일반열차, 경전선 마산역~광주역 일반열차 등의 운행이 중단됐다.
코레일 관계자는 “기상 상황에 따라 구간별 운행 현황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열차 이용 때는 모바일 앱 ‘코레일톡’과 코레일 홈페이지에서 반드시 실시간 열차 운행 상황을 확인해 달라”고 당부했다.
서울 성동구가 아이들의 안전한 등하굣길을 만들기 위해 ‘워킹스쿨버스’를 방학 중에도 계속 운영한다고 21일 밝혔다.
성동구가 2014년부터 시작한 ‘워킹스쿨버스’는 걸어 다니는 스쿨버스라는 의미로 교통안전 지도사가 초등학교 1~3학년 학생들과 통학길을 동행해 교통사고와 각종 범죄로부터 어린이들을 보호하는 통학지도 시스템이다.
구에 따르면 올여름에도 관내 16개 초등학교, 38개 노선에서 총 65명의 교통안전 지도사가 432명 어린이들의 안전한 등하굣길을 책임진다. 평상시 학기 중에는 17개 초등학교, 43개 노선에서 127명의 교통안전 지도사가 1060명의 학생을 지원해 전국 최대 규모로 운영하고 있다.
또 아이들의 등하교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호자에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으로 공유한다. 이번 여름방학 워킹스쿨버스 운영이 끝난 후에는 학생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만족도 조사를 실시해, 현장 수요와 의견을 반영할 계획이라고 구는 설명했다.
정원오 성동구청장은 “아이들이 지역 사회 모두의 관심과 보호 속에서 안심하고 등하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방학 중에도 전국에서 가장 모범이 되는 성동구 워킹스쿨버스가 계속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김홍걸 이사장 유품 정리 중 발견고어·일본식 한자 많아 1년 작업
박정희 비상계엄 선포일 등긴박했던 국내외 정세 생생히
아내와 세 아들 남겨두고 떠난기약 없는 망명 투쟁의 길가장의 불안·고통 고스란히 담겨
난중일기와 비견될 시대 기록물
박정희 정권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던 1972년 10월17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일본에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교통사고 후유증 치료와 일본 정치인들과의 만남을 위해 그해 일본을 자주 방문했다. 계엄 선포 당일에도 당시 일본 참의원 의장인 고노 겐조를 만나고 돌아온 참이었다. 그는 아내인 이희호 여사에게 귀국이 어려워졌음을 전하고, 다음날부터 긴 망명길에 오른다.
김 전 대통령은 계엄 이전인 그해 8월26일 일기에 ‘1975년에는 선거가 없을 것’이라고 적었다. 1971년 대선 유세 내내 “정권교체에 성공하지 못하면 다음 선거는 치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그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다.
“나는 이 일기를 단장(斷腸)의 심정으로 쓴다. 그것은 오늘로 우리 조국의 민주주의가 형해(形骸)마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 나는 결국은 박정희씨가 말하는 남북통일 촉진 운운은 거짓 명분이고 그의 독재적 영구집권을 위한 것이 분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1972년 10월17일)
계엄 이후 국회는 해산됐고, 헌법은 정지됐다. 김 전 대통령은 “청천벽력의 폭거요, 용서할 수 없는 반민주적 처사”라고 비판했다. 그는 귀국할지 망명할지를 택해야 했다. 국내로 돌아가면 유신 정부에 검거돼 아무 활동도 할 수 없을 게 자명했다. 그는 일본과 미국을 돌며 반유신 투쟁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최근 출간된 <김대중 망명일기>(한길사)는 1972년 8월3일부터 1973년 5월11일까지 김 전 대통령이 자필로 쓴 일기 223편을 수록한 책이다. 지난해 여름, 유품 정리를 하던 김홍걸 김대중·이희호 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서울 마포구 동교동 자택에서 김 전 대통령이 쓴 6권의 수첩을 발견했다. 김 전 대통령이 생전에 단 한마디도 언급한 적이 없는 기록물이었다. 수기로 적힌 일기는 고어(古語)가 많고 일본식 한자 표현도 다수 사용돼 이를 제대로 판독하기 위해 여러 전문가가 1년가량 힘을 모았다.
김홍걸 이사장은 22일 서울 마포구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김대중 망명일기>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유품을 정리하다 쇼핑백 속에 담긴 서류와 일기를 발견했다”며 “당시 일기에 대한 언급이 없었기에 자칫 쓰레기통으로 향할 뻔했지만 운 좋게 발견해 책으로 만들어지게 됐다”고 말했다.
본래 일기에 적힌 제목은 ‘망향일기’였다. 망향일기가 망명일기가 된 것은 역사적 가치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박명림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장은 “개인 김대중으로서 조국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망향의 기록일 수 있지만, 공인 김대중으로서는 자기가 몸담은 공동체의 상황, 비상계엄과 연관된 망명의 기록이라고 생각했다”며 “오랜 토론 끝에 ‘망향’이 아닌 ‘망명’으로 제목을 정했다”고 말했다. 김언호 한길사 대표는 “<난중일기>와 비견될 만한, 당시 시대상을 보여줄 기록물”이라고 했다.
책에는 당시 급박했던 국내외 정세가 생생하게 담겼다. 김 전 대통령은 일본, 미국, 다시 일본에 체류하면서 누구를 만나 무엇을 했는지 상세히 적었다.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등 미국 주요 언론에 자기 뜻을 알렸고, 에드윈 라이샤워 하버드대 교수 등 여러 지식인과 접촉해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전했다.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동생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등 정치인들과의 협력을 강화하면서 유신체제에 대한 국제적인 반대 여론 형성에 이바지했다.
“케네디 의원은 나에게 ‘뉴요커’지의 한국 관계 기사를 읽었다며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부탁하라, 한국보다 당신 개인에게 더욱 관심이 크다, 한국에 가더라도 연락을 끊지 말고 계속 연락하라고 하는 등 극진한 호의를 보여주었다.” (1972년 12월13일)
박명림 관장은 “(김 전 대통령이) 자유, 인권,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사실상 대안정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일기에는 빚더미 속에 아내와 세 아들을 남겨두고 홀로 망명한 가장의 불안과 고통, 기약 없는 망명 투쟁을 이어가는 정치인으로서의 고뇌, 유신 독재의 압력과 회유에 흔들리는 옛 동지들의 소식, 개인적인 안위만을 생각하면서 독재에 신음하는 국내 현실을 외면하는 인사들에 대한 분노 등도 담겼다.
“인생의 가치는 얼마만큼 높은 자리에 있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바르게 최선을 다해서 살았느냐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만고불변의 이치를 잊어버리고 수단 방법을 다해서 돈과 높은 지위만을 위해서 자신조차 잊어버리고 날뛰다 쓰러진다. 하느님과 자기의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그리고 국민과 세계 인류를 위해 헌신한 일생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1972년 8월14일)
“나는 억지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또 역사의 필연성에 근거해서 박정희 정권의 필멸을 확신하며 나의 승리가 있을 날을 위해 대비해나갈 것이다.” (1973년 1월1일)
“가족과 옥중의 동지들을 생각하면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이 괴롭다.” (1973년 1월19일)
“주여, 우리 조국에 민주주의를 베푸소서. 주여, 불행한 동포와 동지들에게 위로를 주소서. 주여, 저의 가족을 보살펴주소서. 주여, 모든 국민이 자기의 권리를 자기의 희생으로 쟁취하는 자각을 주소서.” (1973년 3월1일)
김 이사장은 “박정희 정권에서 독재를 위한 친위 쿠데타를 하고 야당을 제거하기 위해 납치를 자행했던 것처럼, 윤석열 정권도 총선 참패를 국민 탓하고 부정선거라는 음모론을 말하다가 계엄까지 저질렀다”며 “계엄을 획책하는 역사가 반복되는 상황에 ‘망명일기’라는 역사적 기록물이 등장한 게 반갑다”고 말했다.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기획. 4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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